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 코흐 (문단 편집) == 일생 == [[드레스덴]] 출신으로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초등학교 시절에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다고 한다. 집이 가난해서 15살 때 학교를 나와 공장에 취업하고 나중에는 [[도서관]] [[사서(직업)|사서]]로 근무했다. 그런 와중에 [[나치즘]]에 관심을 가져 몇몇 SA 대원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나치]]에 가입했다. 1936년 [[베를린]] 근처의 소도시 [[오라니엔부르크]]의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비서 겸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수용소장 카를 오토 코흐(1897~1945)를 만나 결혼했다. 1937년 부헨발트에서 수용소장 아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마음껏 수감자들을 고문했다. 남녀 가리지 않고 성적 학대를 가했는데 그야말로 별별 짓을 다했다고 한다. 승마용 [[채찍]]으로 자신이 지칠 때까지 때리는 짓에서부터 섹스 파티라든지 별별 추악한 일을 마음껏 즐겼다. 이 짓으로 성불구가 되던 수감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사육하던 맹견에게 여죄수를 던져주는 등 포로학대를 했다는 증언도 무지하게 많이 나왔다. 이 시절에 [[발데마르 호펜]](Waldemar Hoven, 1903~1948)[* 이 인간도 수감자를 해부하고 실험재료로 보던 [[요제프 멩겔레]] 같은 놈이라 나치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이라는 친위대 위생학 연구장교에게 취미로 써먹을 해부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전수받은 기술로 죽은 수감자 시체 살조각을 수집하여 전등 갓으로 만드는가 하면 사람 장기를 해부하였다. 또한 사망한 사람들의 피부를 벗겨내 [[인간 가구|램프셋이나 책 덮개, 장갑 등을 만드는]] 미친 짓거리를 일삼았다. 만약 [[문신]]을 한 수용소 사람들이 있다면 독극물 주사로 그 사람을 살해한 후 문신이 새겨진 피부를 벗겨내어 수집하는 것이 일제의 취미였다. 거기다가 '''가족이 사용하는 저녁 식탁을 두개골로 장식한 인물이니 말 다했다.''' 잔학함과 음란함으로 유명하여 희생자들은 '부헨발트의 마녀, 암캐(Die Hexe von Buchenwald, Buchenwalder Schlampe)'라고 불렀다고 한다. 1938년에 첫아이 아르트빈 코흐를 출산했고, 이듬해에 두번째 아이 기슐라(1939~1939)를 출산했으나 곧 사망한다. 1940년에 출산한 세 번째 아이인 구드룬(1940~1941)도 불과 생후 1년만인 1941년에 죽었다. 결국 세 자녀 중 성년기까지 생존한 건 아르트빈 뿐이다. 그러자 이런 슬픔을 수감자를 괴롭히면서 풀었는지 별 짓을 다했다고 한다. 면도날을 박은 채찍으로 임신부 수감자를 때려 [[유산]]시키고[* 그 수감자는 자살했다고 한다.], 여자 수감자들을 알몸으로 만들어 일부러 남자 수감자들이 있는 방에 가둬서 [[강간]]당하는 모습을 즐겨보기도 했다. 1940년, 수감자들로부터 횡령한(정확히는 유품) 25만 마르크를 들여서 실내 스포츠장을 건설했다. 1941년에는 소수 여성 감독관(Aufseherin)들을 휘하로 두는 최고 여성감독관(Oberaufseherin)으로 임명받아 수용소의 여간수들을 통괄하는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943년 남편과 함께 같이 횡령과 기타 죄목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1944년 말~1945년까지 [[바이마르]]에 투옥되었다. 1945년 초에는 남편 카를 오토가 뮌헨 나치 친위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같은해 4월에 처형되었으나, 일제 코흐는 석방되었다. 그 후 루트비스부르크의 친정에서 살던 중 동년 6월 30일 미군에게 체포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DachauerProzess.jpg]] 1947년 재판 당시 사진. 1947년 전쟁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 만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풀려났고, 1951년 석방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피해자들의 탄원으로 독일 법정에게서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일제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국제인권위원회의 고발위원에게도 대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복역하다가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60세의 나이로 1967년 9월 1일 아이샤흐 여자 형무소에서 침대 시트로 목을 메어 '''[[자살]]했다.''' 여담으로 면회를 온 자식 아르트빈에게 '''"죽음만이 구원이다"'''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